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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온 국민의 마음에 자긍심을 심어준 우리의 영원한 영웅

손기정 옹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출생-사망:1912~2002.11.15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고 16세 때 중국 단둥의 회사에 취직하여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2년 신의주 대표로 제2회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2위를 차지하였고 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메이저대학을 졸업했다.

2002년 11월 15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대한체육회에 의하여

2011년 스포츠영웅으로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과 함께 선정되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운집한 12만 명의 관중들은 숨죽이며 곧이어 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마라톤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림픽의 마지막 공식 경기이자, 그야말로 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특히 이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더욱더 그랬다.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여 광적인 나치즘으로 몰고 가던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독일 국민들이 목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종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히틀러와 손기정이 동시대의 사람이었다니 믿기지가 않지만)

그러나 결승점인 올림픽 스타디움에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인도 아닌 당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작고 깡마르고 머리를 바싹 자른,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표정의 마라토너, 바로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이었다.

 

‘한국 대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der Koreaner)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 자료.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1등으로 스타디움으로 들어왔을 때 이를 중계했던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이다. 당시 독일의 중계 아나운서는 그가 일본국적에 손기테란 이상한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긴 했으나, 그가 Koreaner(한국인)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스타디움 안으로 달려온 손기정은 장내 트랙을 한 바퀴마저 돌며 마라톤 42.195km의 마지막을 채웠다. 운집한 12만명의 관객들은 그의 마지막 질주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 그의 마지막 100m 기록은 11초였다 (현대 시대에도 이 기록은 쉽지가 않다.)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동양에서 온 작고 다부진 마라토너 손기정. 그의 얼굴엔 표정이 거의 없었다. 손기정은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하고 묵묵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 29분 19초 2. 세계최고기록이었다. 당시로서는 인간이 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마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선 것이다. 그것도 세계최고기록으로 56명의

 세계 강호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하였다.

세계무대에 알려진 바 없는 동양에서 온 이 작고 과묵한 청년 마라토너는 세계인들뿐만 아니라 아라아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던 나치들마저도 감동하게 했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와 악수하려 하였고 히틀러를 도와 인종주의적인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제작하던 독일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중에 10분 이상을 손기정의 뛰는 모습으로 채웠다. 레니 리펜슈탈은 그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으며 손기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손기정은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으며 소학교 다닐 무렵 해일로 인해 집안이 몰락하였다. 집안이 가난했으니 손기정은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나서야 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16세 무렵에는 중국 단둥[]의 회사에 취직했는데 이 무렵 손기정은 차비가 없어서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하였다. 운명의 장난인가 가난이 그의 체력단련에 도움이 된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뿐만 아니라 운동에 소질을 보였는데 품팔이와 배달일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손기정은 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학생들을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다면 스케이트 선수를 했지 마라톤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손기정 자신에게 주어진 운동 소질을 발휘할 길은 경비가 들지 않는 달리기뿐이었다.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 때 안의전(중국 안동과 신의주 간 대항경기)에 출전하여 어른들을 제치고 5,000m에서 우승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전국체육대회(조선 신궁 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5,000m에서 2위를 하였고 이듬해 1932년 동아일보 주최 하프 마라톤에서 2위를 하면서 이 인연으로 양정고보(지금의 양정고교)에 입학하게 된 손기정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고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저 혼자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선수로서 훈련을 받은 손기정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하였다. 전 일본 올림픽 파견 1차 예선에서 2시간 26분 14초를 비롯하여, 한 해 동안에 2시간 30분 벽을 3번이나 돌파, 체육계를 놀라게 했고 이로 인해 일본인들로 하여금 마라톤 세계 제패를 꿈꾸게 했다. 손기정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고 그중 10번 우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발군의 실력으로 인해 일본의 올림픽 국가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시작된 마라톤 경기. 이 경기는 왕복코스를 도는 경기로 세계 각국에서 온 56명의 선수들이 함께 출발했다. 손기정은 양정고보 선배이던 남승룡과 함께 경기에 출전했다. 출발신호와 함께 선수들이 빠져나갔는데 손기정과 남승룡은 출발이 다소 늦었다. 손기정은 22번째, 남승룡은 49번째였다. 당시 세계의 주목을 받던 선수는 1932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바라였다. 자바라의 성급한 독주를 뒤에서 바라보면서 손기정은 자신의 기록과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사전에 코스를 철저히 답사해 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30km 지점 비스마르크 언덕오르막에서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바라는 뒤로 처지고 손기정과 영국의 하퍼가 1,2위를 다투며 앞섰다, 그 뒤를 남승룡이 따랐다. 그리고 31km 지점에서 손기정은 마침내 영국의 하퍼를 따돌리고 1위로 나섰다. 작은 러닝슈즈로 인해 발에 통증을 느끼면서 손기정은 남은 레이스를 1등으로 묵묵히 달려 세계 최고기록으로 영광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남승룡은 하퍼에 뒤이어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승선 통과 후 손기정은 만세도 하지 않았고 환호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레이스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운동화를 벗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탈의실로 퇴장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시상대의 손기정과 남승룡도 마찬가지였다. 은메달을 딴 영국 선수 하퍼의 해맑음과 대조적으로 손기정과 남승룡은 우울해 보였다.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올 때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남승룡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입고 있던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손기정은 의기소침했고 슬퍼 보였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발로 뛰어 얻은 이 영광이 조국의 것이 아니라 조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기정이 입은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서 올린 신문 사진.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하였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일장기 말소 문제가 불거진 것은 8월 25일 <동아일보>에 다시 한번 이 사진이 게재되면서였는데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이던 이길용은 사회부장이던 현진건 등과 의논하여 손기정이 입은 옷에서 일장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이는 비록 일본의 국기를 달고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지만, 손기정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임을 자부하고 싶은 언론인들의 소심한 항거였다.(이 부분에서 박수를 보낸다)

<동아일보> 기사는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급하여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여운형은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신문은 폐간되었다. <동아일보>는 간부들의 사직과 함께 이길용, 현진건, 신낙균 등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으며 무기 정간조치를 받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당시 기자들의 행동이 사측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정간을 풀고 9개월 만에 신문을 재발간 했는데

이 사건에 더하여 손기정은 월계수나무로 일장기를 가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후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영광된 세계 최고 기록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식민지의 금메달리스트는 일제로부터 합당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손기정은 일본의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마치고 1944년  조선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 때 관계를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의 연락담당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대를 이을 한국인 후계를 키우는데 전념했다.

해방 후 손기정은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활동하여 서윤복과 함기용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1947년 해방 후 첫 해외 원정인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서윤복, 남승룡 양 선수를 이끌고 참가, 서윤복을 우승케 하여 막 일제 압정에서 풀려난 우리 민족에게 또 하나의 기쁨과 자부심,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1950년에도 참가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세 선수가 1,2,3등을 독점하게 한 명감독이었다. 이후 손기정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서울특별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뛰었는데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당시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 드니 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독일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가서야 반환받기도 했다.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1993년에는 중국이 올림픽 10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올림픽 스타 100 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되어 있고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살아생전 손기정은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일본 올림픽위원회가 손기정에 대한 국적 변경 신청을 해주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손기정은 미국 칼바시티까지 날아가 그곳 마라톤 비의 "japan, 손기정"을 "Korea, 손기정"으로 바로 잡는데 열성적 교섭을 벌여 성공하였다.  손기정의 일대기를 쓴 자료에는 국적을 한국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의 이름 손기정을 표기하였고, 당시 그가 일본국적을 달고 경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업적과 명성은 국내 못지않게 해외에서 더 높았다. 손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전후를 면밀히 취재한 바 있는 미국의 작가 리처드 만델(Richard Mandell)은 그의 저서 《나치 올림픽(The Nazi Olympics)》에서 '손기정 선수는 어려서부터 민족 독립주의자이며 전후(戰後) 조선 독립운동의 리더로서도 공적을 올렸다'라고 했으며 '손기정과 남승룡은 베를린에서도 기자들에게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려 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당시 손은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공식 서명을 할 때는 모두 한글로 썼으며 그 옆에는 조선 지도를 그려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조선에서 왔다'라고, 당시로서는 투옥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대답을 서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나치게 말수가 적은 그는 후일 자신의 훈련 과정에 대해 별로 말한 적이 없으나 만델은 '손기정 선수는 연습 때, 바짓가랑이에 모래를 넣기도 하고, 등에는 돌을 매달고 장거리를 연습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힘들게 딴 금메달을 조국의 영광으로 돌리지 못한 한 때문이었을까? 1992년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손기정은 누구보다도 황영조의 우승을 기뻐하며 마치 자신의 우승처럼 여기며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 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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