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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안중근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 지주였다. 즉,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西) 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안중근은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그런데 안중근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혁신 유림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 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와 사기()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이때 안중근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 석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즉, 이러한 사실이 중앙 정부에 알려지자 당시 갑오내각의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양곡 반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양곡을 군량미로 다 사용한 안중근의 부친은 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화파 동지인 김종한()의 도움을 받아 이를 무마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 · 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자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閔泳駿)이 다시 강력하게 양곡 반환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중근의 부친은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안중근의 부친은 프랑스인 빌렘(J. Wilhelem : 洪錫九)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안중근은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와 함께 불어를 배우며 천주교의 포교에도 힘썼다. 안중근은 전도 활동 중에 일반 민중들과 광범위하게 접하면서 그들의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을 깨닫고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민중 계몽에 종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상경하여 외국인 신부들과 상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함에 따라 대학교 설립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 일로 안중근은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불신을 갖고 배우던 불어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안중근의 천주교에 대한 신념은 굳었고, 신도들에 대한 사랑은 깊었는데

인근 금광의 감리()가 천주교를 심하게 비방하자 안중근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 설득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 고위 관리에게 처와 재산을 겁탈당한 천주교 신도의 딱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상경하여 권력층과 당당히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즉 안중근은 천주교의 입장에서, 그 교리인 박애주의를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안중근은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안중근은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이어 [정미 7 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안중근은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김기룡()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 안중근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 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안중근은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보내게 되어 있다."라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안중근이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안중근은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이범석()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를, 김태훈()은 이완용()의 암살 제거를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안중근은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최재형, 유진률(兪鎭律), 이강(李剛), 우덕순(禹德淳) 등이 그들이다. 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안중근과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안중근은 이토를 포살 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안중근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 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후 안중근은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안중근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안중근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은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안중근은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안중근은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역사』를 끝내고,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안정근()·안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안중근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안중근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안중근이 순국한 뒤 세계사의 진행 상황을 보면 이는 참으로 빛나는 견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안중근의 이러한 충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지속적인 전쟁의 확대와 그로 인한 인류의 피해로 결판났을 뿐이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동양이나 서구,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의 전개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에도 안중근의 사상은 새삼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에서는 안중근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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