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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은 역사적 인물이자 문학적인 인물이다. 평강왕 시대 고구려의 대형() 벼슬을 한 장수였는가 하면, 김부식의 노련한 붓놀림으로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상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바보에서

장수까지 가장 극적인 생애를 살다 간 온달에게 많은 사람의 애정과 관심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수사의 전모를 살펴보자.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때의 장군으로 북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아단성()에서 전사했다.


고구려 제25대 평강왕(재위 559∼590)은 평원왕또는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양원왕의 큰아들로 태어나 왕 13년(557)에 태자가 되고, 이태 뒤인 559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대로 중국의 진()·수()·북제()·북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다. 56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영동이교위요동군공고구려왕(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의 지위를, 563년에는 진나라로부터 ‘영동장군()’의 지위를 받았다. 또 580년에는 북주에 조공하고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의 지위를, 581년에는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대장군요동군공()’의 지위를 받았다.

한편,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는 장안성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었다. 공사는 양원왕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그는 장수왕만 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조정의 내분과 민심의 혼란이 심각한 상태로 커져 갔다. 왕위에 오르자 평강왕은 이 같은 위기부터 극복해야 했다.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재위 중 왕의 음식을 줄이고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을 장려하였다. 장안성()의 축성 또한 일시 중단하였다. 내분 수습을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평강왕은 커져만 가는 귀족세력의 힘을 제압하기가 버거웠다. 586년, 겨우 조성을 마친 장안성으로 궁을 옮겼는데, 이번에는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이어 오던 중국 북조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북주의 무제()가 요동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평강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에서 싸웠고, 또 590년에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의 통일은 고구려에게 정치적ㆍ군사적 부담을 바로 안겨 주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586년, 거란별부() 출복() 등이 이탈하여 수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들은 본디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돌궐()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두 세력 사이의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런 위기감은 남쪽으로도 마찬가지였다. 한강유역의 점령을 둘러싸고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고구려는 일단 관망의 자세를 취했지만, 언제 불똥이 고구려 쪽으로 튈지 몰랐다.


 

이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온달()이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앞서 소개한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을 통해 자세하다. 실로 이후 온달을 언급하는 거의 모든 기록은 이 전기로부터 빌리지 않음이 없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고, 먼저 그의 모습을 그렸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므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바보라고 불린 것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본문에도 '마음은 순수하였다.'라고 쓰여있듯이 '온달은 가난해서 산을 뒤져서 먹고살았는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형편을 감안해 그냥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보라고 불렀는데 온달은 별 말 하지 않고 웃어넘겨 더욱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설. 요컨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손해 보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실제로 흔히 말하는 발달장애인이나 저지능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진짜 저 지능 자라면 학문과 무예를 익혀 고위직에 오를 수가 없기 때문. 그런데 평양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국왕까지 바보 온달의 소문을 듣고 딸에게 말했을 정도면 온달의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우외환에 하루도 편할 날 없는 평강왕에게 또 하나 골칫거리가 있었다. 어린 딸이 곧잘 우는 것이었다. 어찌나 울었든지 왕은 농담 삼아,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는구나.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 될 게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지.”라고 하였다. 왕은 울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었다. 왕이 상부 고() 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가, “아버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지요.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요. 이제 와서 말씀을 바꾸시는 건 무슨 까닭이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며 정색을 했다. 울어서 골칫거리 더니 이제는 엉뚱한 생각마저 하는 것 같아 왕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한두 번 타이르면 될 줄 알았는데, 공주의 심지는 곧았다.

공주는 끝내 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보검() 수십 자루’를 팔뚝에 걸고 나왔다고 썼다. 큰 차이는 없겠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어머니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하자,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한 사람이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구려. 반드시 천하의 귀한 사람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못해 느릅나무껍질을 벗기려고 산속으로 간 지 오래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요.”라고, 어머니는 황당해하며 말했다. 가난한 여자의 말치고 너무 점잖으나 말이야 맞다. 말투는 김부식의 윤문 탓일 뿐이다.

공주는 온달을 직접 만나기로 하였다.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던 온달에게 썩 나서자,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터,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친다. 온달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어머니 또한, “내 자식은 비천해서 귀한 사람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살 수 없다오.”라며, 어제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공주는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며 설득한다. 사실 이 말은 한 나라 문제()와 형제간이었던 회남의 여왕() 사이의 불화 때문에 나왔었다. [사기()]의 회남형산열전()에 보인다. 그러므로 경우가 다르다. 다만 가난한 살림 나 마음먹기에 따라서 화목해질 수 있다는 비유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공주의 회유는 겨우 성공하였다. 그제야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갖추어졌다. 말을 살 때는 공주가 온달에게,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고르세요. 그 가운데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 오세요.”라고 했다. 온달은 이르는 대로 말을 사 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온달 또한 더불어 건장한 장수로 성장하였다.

평강공주가 유력한 귀족과 결혼하지 않고 하필이면 비천한 신분의 온달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평원왕이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술책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평강공주의 가출이 집안 문제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이런 결혼은 막장드라마나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일.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원수도 배출하는 유력 정치인 가문의 딸이 노숙자와 결혼한다는 식인데, 엄격한 신분제였던 고대에 당시 저런 식의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어찌됐든 온달의 조상이 평민이었건 하급 귀족이었든 아니면 이민족 출신이었든 간에 확실한 것은, 그가 가난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고 출세했다는 점이다. 공주와의 결혼이라는 우연적 요소가 개입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목표에 도달하는 입지전적 과정이 온달을 이해하는 데 훨씬 본질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온달의 이름이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번의 싸움에서이다. 첫째는 북주의 무제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이고, 둘째는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치러 갔을 때이다. 온달은 평강왕이 직접 나선 전쟁의 선봉장으로 나섰으며, 신라와의 싸움에는 자진해서 나갔었다. 그렇다면 온달은 어떻게 발탁되었는가.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 3일을 맞아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을 바쳤다. 그날이 되자 왕은 사냥을 나갔다.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달리고, 또한 잡은 짐승도 많아서 남들이 따르지 못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물었다. 온달이었다.

울보 공주가 궁을 나가 함께 살고 있다는 그였다. 왕은 놀랍고 기이하게 여기며 발탁하였다.

온달에게 활약한 기회는 곧 왔다. 북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한 바로 그 싸움에서였다. 평강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온달이 활약한 첫 싸움이었다.현존하는 삼국사기 중에서 기존의 옥산서원본이나 정덕본은 온달이 참전한 장소를 배산(拜山)으로,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암본에서는 이산(肄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적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영접하고 벼슬을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평원왕 19년(578) 11월의 일이었다.

590년 평강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하였다. 온달은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어리석은 저를 못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가서 반드시 땅을 되찾아오겠습니다.”

역사서에 적힌 그의 두 번째 활약상이 여기서 펼쳐진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최후를 알리는 슬픈 사건이기도 하였다. 신라가 한강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의 군현으로 만들자, 군사를 준다면 제 땅을 도로 찾겠다고 다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의 맹세는 계립현과 죽령 서쪽을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단성 곧 지금의 아차산 밑이 온달에게는 마지막 자리였다. 거기서 온달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 후 기록이 없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고 추정되었으나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수나라와 전쟁할 때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뺏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온달이 사망한 590년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난 598년, 612-614년 사이에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잠시 회복했었다는 말이 된다.

다만 이 기간에도 신라와 수나라는 여전히 양국의 사신이 왕래했고, 수도가 동해안에 있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를 받지 않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경주부터 한강 하류까지 남한강 루트가 연결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온달이 수복한 지역은 적어도 죽령 이북 전체까지는 아니고 조금 더 작았을 것이다. 이를 죽령 이북이라고 표현한 것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권리를 강조하기 위한 약간의 과장이다.

온달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 그때에야 영구가 움직여 하관 하였다. 아름답고 비통한 장면이다.

 

온달(溫達)이 전사한 아단성(阿旦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광진구 아차산(峨嵯山)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이라는 주장과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溫達山城)이라는 주장으로 엇갈린다. 두 곳 모두에 온달과 관련된 설화와 유적이 전해진다. 아차산(峨嵯山)에는 온달이 마셨다는 온달샘 등이 전해지며, 단양에는 온달동굴과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 등이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차산성([阿且山城)이 온달(溫達)의 죽음과 관련된 아단성(阿旦城)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삼국의 형세로 볼 때 고구려의 군대는 남한강의 상류 지방인 단양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탈환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말기의 문장가 김택영은 나라가 기울자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의 가슴에 품은 한과 울분을 오늘의 우리가 쉽게 헤아리기는 어렵다. 떠나기는 떠나되, 마지막으로 문장 하는 자가 나라에 보탬이 될 한 가지 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대 문장가 9명을 뽑고, 그들의 글 가운데 대표작을 가려 [여한구가문초()]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비록 나라는 기울었으되, 빛나는 문장으로 장식한 문명국가의 전통을 잊지 말아 달라는 비원, 우리는 그의 손길에서 짐작한다. 원고는 뒷날을 기약하며 제자인 왕성순에게 맡겨졌다.

김택영이 뽑은 첫 번째 문장가가 김부식이었다. 고려시대 문장가로 첫 손에 들어 손색없었다. 그의 문장 6편이 골라졌다. [동문선]에 실려 전해오는 ‘진삼국사표()’와 ‘혜음사신창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4편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글이다. 그것은 김후직, 거칠부, 백결 선생, 그리고 온달의 전기였다.

이 가운데 온달전()은 김택영의 안목을 빛나게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12세기 우리 문화의 척도이려니와, 온달전은 [사기]가 자랑하는백이, 숙제의 전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천한 백성으로 태어나, 게다가 바보 소리나 듣는 떠꺼머리가, 아름다운 훈육을 받아 성장하는 과정과, 기울어가는 나라의 기둥을 다시 세우려 죽기까지 각오하고, 끝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해서는 차마 시신마저 안타까워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김부식의 마음과 김택영의 마음은 온달 속에 좋이 포개진다.

김부식이 있으므로 온달이 있고, 김택영이 있으므로 문장의 가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거꾸로 말하자면, 김택영이나 김부식 같은 이들이 온달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새삼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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