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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그리고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신사임당(, 1504~1551). 사임당은 현모양처()를 상징하는 인물로 5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신사임당만큼 존경받은 여성도 드물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성 최초로 고액권인 5만 원 화폐 도안 인물로까지 이어졌다. 선덕여왕, 유관순 열사 등 몇몇 후보 인물들이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신사임당이 최종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녀의 삶은 50년이 채 안 되지만 그녀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계속되고 있다.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에서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와 강릉 사람인 어머니 용인 이 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은 서쪽으로 대관령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예국()의 수도로 오랜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본관이 평산으로 고려 태조 때의 건국공신인 신숭겸의 18세손이다. 신사임당의 조부이자 신명화의 부친인 신숙권은 영월군수로 재임한 적이 있고, 이때 매죽루()라는 누각을 창건하기도 했다. 신명화는 서울 출신으로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다가 마흔(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이 넘어서야 비로소 진사()가 되었을 뿐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전한다. 신명화가 44세 되던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기묘사()가 일어났으나, 벼슬을 하지 않았던 덕에 화를 면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생애에서 눈 여겨봐야 할 것이 강릉지역에 터를 둔 외가이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어머니 이씨 부인은 본관이 용인이며 강릉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손녀이다. 이 씨 부인은 강릉에서 외조부인 최응현 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최치운은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신사임당과 모친인 이 씨 부인이 외가 쪽과 밀접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의 가족문화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는 부계중심의 가족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가족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린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중기까지 결혼을 바탕으로 한 가족문화는 여성의 거주지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때문에 신사임당과 그의 어머니인 이 씨 부인이 친정 쪽에서 거주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신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사임당 외에도 시임당·임사제라고도 하였다. 사임당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부덕을 갖추었다는 태임()을 본받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신사임당의 롤모델(role model)이었다.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사임당은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녀의 그림 · 글씨 · 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어죽(魚竹) · 매화 · 난초 ·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세종 때 안견의 [몽유도원도],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의 산수화를 보면서 모방해 그렸고 특히 풀벌레와 포도를 그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 · 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는 신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다.

거기서 신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여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였다.

그러므로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대여 명종 때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신사임당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신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이 이 여섯 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 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 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이후 두산동 최씨가에서 보관하던 여섯 폭짜리 초서는 1971년 강릉시에 인계되어 율곡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섯 폭짜리 초서는 신사임당초서병풍()인데,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윤종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은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 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면서 아버지 신명화 보다는 시와 그림, 글씨 등을 외가를 통해 전수받았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때로 남편은 덕수 이 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기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친정어머니인 용인이 씨와 살았다. 용인이 씨가 아들이 없어 딸인 신사임당이 아들처럼 어머니를 모신 것인데, 조선초기까지도 전통적인 친정살이 혼인 풍습이 이어졌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남자 형제가 없었던 용인 이 씨도 결혼한 뒤에 신사임당의 외할머니가 되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사임당 또한 어머니 용인 이 씨를 이어 친정살이를 한 것이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살기도 했다. 때로는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 아들인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재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간혹 아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부군인 이원수의 나이가 51세였고 사임당이 사망한 이후 10년을 더 살았다. 부인을 잃은 후 이원수는 어린 자식들 때문이었는지 재혼하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했다. 사임당은 뒤에 아들 이이 덕분에 정경부인에 증직 되었고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오죽헌과 묘소가 있는 조운산이 있다.사임당이 사망할 무렵 이이의 나이는 16세였다. 십 대 중반에 어머니를 여의자 금강산에 입산할 정도로 방황했다. 이후 어머니를 대신한 외조모의 따뜻한 정은 관직에 나가서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조정으로 본다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보잘것없는 존재이오나 외조모에게 신은 마치 천금의 보물 같은 몸이오며, 신 역시 한번 외조모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율곡전서])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동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소세양()은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동양신씨의 그림족자]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신사임당이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 했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화가 보다는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신령스러운 천지의 기운을 받아 율곡을 잉태한 여성이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 사임당으로 더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신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신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사임당의 일생을 돌아보면,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었다. 따라서 화가라는 자신의 일생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 부각되었다. 이는 사임당을 부덕의 상징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게 한 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임당의 정체성을 고정화시켰고, 다양한 렌즈로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 신사임당이 어떤 여성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런지, 그녀의 부덕보다는 화가로서 추구했던 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

 

 

신사임당은 조선전기 「자리도」·「초충도」·「노안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태어나 1551년(명종 6)에 사망했다. 이이의 어머니로서 시·그림·글씨에 능한 예술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친정의 아들잡이로서 친정에 살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고, 신사임당도 남편의 외조 속에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 고상한 정신·기백을 드러내는 글씨는 모두가 탐낼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이다. 사임당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겠다는 뜻에서 사용된 당호로 임사재()라고 칭하기도 했다. 본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이 인선()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

아버지는 영월군수() 신숙권()의 아들 신명화()이고, 어머니는 세조 때의 원종공신() 이유약()의 손자인 이사온()의 외동딸 용인 이 씨(龍仁李氏)이다. 사헌부 감찰() 등을 지낸 이원수()와 결혼하여 이선()·이번() 이이()·이우()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윤섭()·홍천우()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딸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맏딸이 매창()이란 호를 사용한 기록만 남아있다.

신사임당의 삶은 아들인 이이가 기록한 〈선비행장()〉이라는 글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히 전해진다. 그 기록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 10) 음력 10월 29일에 외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에서 신명화와 용인 이 씨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의 외조부인 이사온은 대사헌·한성부좌윤·형조참판 등을 지낸 최응현()의 딸 강릉 최씨()와 결혼해서 딸 하나만 낳았는데, 그가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 씨이다. 외조부 이사온은 결혼한 뒤에 처가로부터 오죽헌()을 물려받아 강릉 북평촌()에 살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인 신명화도 1516년(중종 11) 식년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인 용인 이 씨는 신사임당을 낳은 뒤 줄곧 남편과 떨어져 강릉에 머물렀기 때문에 신사임당도 외가인 강릉에서 성장했다.

이에 신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외조부인 이사온의 총애를 받아 그에게 학문과 시()·서() 등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녀가 그림에 재능을 보이자 외조부 이사온이 안견()의 그림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신사임당이 7세 때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해 산수도()를 그렸는데, 그때 이미 매우 절묘한 솜씨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경전()에 능통하고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바느질과 자수까지 정묘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자가 출가한 뒤에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한 유교적 규범 속에서도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신사임당의 예술 속에서 나타나듯이 거짓 없는 본연성을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신사임당은 1522년(중종 17) 태종 때 한성부윤() 등을 지낸 이추()의 증손이자 홍산현감()·판관()을 지낸 이의석()의 손자인 이원수()와 결혼했다. 신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원수의 조모는 세종 때 한글 창제에 반대한 인물로 유명한 유학자 최만리()의 딸인 해주 최 씨(海州崔氏)이다. 이원수의 아버지인 이천()은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이천의 사촌들인 이기()와 이행() 형제들은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한 뒤에 한성부윤()과 공조판서() 등의 직위에 올라 있었다. 곧 이원수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이어진 유력 가문이며, 특히 중종 때 이후 융성하던 가문 출신이었다.

이이의 〈선비행장〉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결혼하자 그녀의 아버지인 신명화가 이원수에게 신사임당만큼은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신명화가 죽자 1524년 강릉을 떠나 시댁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다. 그러나 그 뒤 다시 강릉으로 가서 살기도 하고, 한때는 강원도 평창에서 살기도 했으나, 1541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수진방(, 지금의 수동동 일대)에서 살았다. 언제나 강릉을 그리워하며 한밤에 눈물을 흘리며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1550년(명종 5) 이원수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는 수운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봄에 삼청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에 이원수는 이선과 이이 두 아들과 함께 조운()의 일로 평안도로 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병이 난 신사임당은 음력 5월 17일 새벽에 사망했다.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그날 관서 지방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서강(西)에 도착했는데, 신사임당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 전에 행장에 있던 유기그릇이 모두 빨갛게 변하는 괴이한 일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사임당은 죽은 뒤에 파주 두문리()의 자운산()에 매장되었다. 현재 파주 자운서원()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율곡 이이의 묘역 아래에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합장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사임당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예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들인 이이의 영향으로 그녀가 조선 중기 이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여겨지면서 그녀의 글씨와 그림을 상찬 하는 유학자들의 글은 많이 전해지지만, 막상 그녀가 직접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으로 확인되는 작품들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녀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 풀·벌레를 그린 초충도()가 크게 유행했다. 그래서 오늘날 그녀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들은 진작()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전칭작()들이 대부분이다.

신사임당은 쓴 시는 이이의 〈선비행장〉에 〈유대관령망친정()〉, 〈사친()〉, 〈낙구()〉 세 작품이 수록되어 전해진다. 칠언()과 오언()의 한시()인 이 작품들은 모두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나타내고 있는데, 격조를 갖추어 그러한 감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신사임당이 쓴 것으로 알려진 글씨는 현재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신사임당초서병풍()〉,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두 폭의 〈산수도〉에 제화()로 당시()의 구절들을 적어놓은 것 등이 전해진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 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격찬하였다.

특히 종이에 당나라 때의 오언절구 6수를 초서로 쓴 〈신사임당초서병풍〉의 글씨는 짜임이 단정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풍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글씨는 그녀의 아들인 이우와 황기로(), 백광훈() 등의 서체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서, 일부 학자들은 이들을 ‘사임당서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사임당의 그림에 관해 이이는 〈선비행장〉에서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은 〈신사임당묘갈문()〉에서 “서화()에 있어서도 묘경()에 이르러 이것을 얻은 자는 구슬을 안은 듯이 보배로 여겼다”고 기록하였으며, 어숙권()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신사임당의 포도그림과 산수화가 안견에 버금간다고 적었다.

오늘날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산수도()〉, 〈초충도()〉, 〈묵포도도()〉, 〈노련도()〉, 〈어하도()〉 등이 있다. 안견과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산수화 유파인 절파()의 영향이 드러나는 〈산수도〉는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로 산수를 묘사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초충도병()〉에는 8폭의 초충도가 전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된 화첩 등에 신사임당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림들이 다수 전해진다.

한편, 신사임당의 맏딸인 이매창()과 넷째 아들인 이우도 서화에 능해 명성을 떨쳤다. 현재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는 이매창이 그린 〈매화도()〉와 이우가 그린 〈국화도()〉가 함께 화첩으로 만들어져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이매창의 아들로 신사임당의 외손자인 조영()도 서화에 능해서 〈군산이우도()〉라는 그림을 남겼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우(瑀)와 큰딸 매창(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 〈산수도(山水圖)〉 · 〈초충도(草蟲圖)〉 · 〈노안도(蘆雁圖)〉 · 〈연로도(蓮鷺圖)〉 · 〈요안조압도(寥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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