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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개소문-고구려를 멸망케 한 독재자

만수르재윤 2023. 7. 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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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665년(보장왕 24)에 사망했다. 동부 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당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과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의 성(姓)은 ‘연(淵)’씨 혹은 ‘천(泉)’씨인데,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가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였다는

정도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1923년 중국 하남성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장남 천남생(泉男生)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그 가계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묘지명에서는 천남생의 증조부는 자유(子遊), 조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아버지 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남생의 조부와 부친인 개소문은 군권을 쥐고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도 거기에서 유래된 것 같다. 샘이나 내[川], 또는 호수의 정령(精靈)을 두려워하고 공경해, 이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결시키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 민족의 설화와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보인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 했다고 한다. 동부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였다.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했으나 귀족들에게 호소해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장성을 축조 중이었는데 영류왕은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을 연개소문에게 맡겼다. 이것이 642년 10월의 일로, 연개소문의 이름이 사서에 첫 등장하는 내용이다.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으로 떠난 사이 영류왕과 여러 대인들은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모의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었다. 연개소문은 평양으로 돌아와 군대를 점검한다는 것을 핑계로 대신들을 불러 모았고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이어 궁궐로 들어가 영류왕까지 시해하고, 영류왕 동생의 아들인 장(臧)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후 국정 전반을 운영하였다.

스스로는 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도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 간의 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했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다. 안시성주와의 타협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선임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했고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여의치 않으면 각기 무력을 동원하였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이 없어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정변은 때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은 그러한 사정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지위의 세습됨으로 보아, 연 씨 일가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집권 후 그는 종교정책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해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 중국세력과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 때 발생한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졌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정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켰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면서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 간의 충돌이 빈번했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 간의 분쟁은 더 격화되었다.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해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 관계가 있다. 그는 대외적인 위기상황은 정권의 안정화와 집권력의 강화를 도모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했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사신을 가두어버리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신라에서 백제와의 전쟁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김춘추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춘추가 사위 품석(品釋)이 성주로 있었던 대야성(大耶城)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것이다. 연개소문과 김춘추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국정 운영 전반을 주도한 실권자들로,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백제의 무도함을 토로하며 원병을 요청하자 보장왕은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으나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竹嶺)일대를 돌려준다면 구원에 응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춘추는 자신은 일개 신하일 뿐이므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니 별관(別館)에 가두어버렸다. 김춘추가 신라를 떠나기 전, 김유신(金庾信)과 맹약을 맺었는데 만일 60일이 지나도 고구려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김유신이 구원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고,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원병 요청을 거절한 이후 신라는 당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적극적인 대당(對唐)외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결국 642년 김춘추의 원병 요청에 대한 연개소문의 거부로 신라와 고구려의 외교 정책은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고 이는 이후의 삼국통일전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해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말갈족과 같은 휘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전쟁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지는 645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군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연개소문은 왕을 시해하고 집권하였기 때문에 당이 언제라도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일단 당시 당에서 성행한 도교(道敎)를 요청하면서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펼쳤다.

실제로 당태종은 영류왕이 시해되었으므로 고구려의 백성을 위로하고 연개소문을 처벌하겠다는 ‘조민벌죄(弔民伐罪)’의 명분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고구려의 대비가 철저할 것을 우려한 신하들의 만류로 일단 그만둔다. 644년 당 조정에서 고구려와의 개전(開戰)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당태종이 개전을 선언하자 연개소문 역시 당에 대하여 취해왔던 온건적 태도를 버리고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668년까지 고구려와 당은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나라와의 관계에서처럼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규정지었던 다원적인 세력 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함에 따라 깨어졌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 따라 수 · 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내부사정과 당나라와 돌궐과의 관계로 때문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 지방을 선제공격해 수나라와 싸움의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그는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해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했듯이, 당태종이 침공해 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 대신 흥성했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해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나아가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던 강국(康國)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때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사마르칸트시 교외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앞 궁전 벽화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인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 있어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성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 · 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해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했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했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젊은 장수를 기용해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상황에서 강력한 통합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이 되 힘을 발휘하였다.

 

 

 

 

 

645년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후회하였고, 죽으면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당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당고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20여 년 가까이

전쟁이라는 불안 속에 시달린 고구려의 백성들은 피폐해져 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 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했고 남건(男建) · 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가졌다. 고구려의 국정 운영을 담당했던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고구려의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물과 물에서 사는 고기처럼 화합하라는 유언을 하였지만 남생이 지방의 여러 성을 살피러 간 사이 아우인 남건(男建) 및 남산(男産)과 갈등이 생겨, 결국 남생은 국내성에 웅거하다 당으로 망명하였다. 667년부터 고구려와 당의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남건과 남산은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항복하였다. 남건은 끝까지 저항하다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후 당으로 옮겨져 검주(黔州)로 유배되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

연개소문의 사망 이후 고구려의 정국은 급속도로 혼란해졌는데 이는 연개소문이 정국 운영에서 차지한 비중이 매우 컸다는 것과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의 사망이 고구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가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 포악한 독재자였다는 평가와,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대한 서술은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연개소문의 성격은 흉악하고 잔인하며 포악하다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642년 연개소문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영류왕을 죽이고 여러 토막으로 잘라 도랑에 버렸다고 서술하면서 패륜적인 면모를 극대화시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치면 군대를 보내 징벌하겠다는 당 태종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당이 파견한 사신 장엄(蔣儼)을 억류하는 등 당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연개소문에 대하여 김부식은 사론(史論)에서 송나라의 왕개보(王介甫)가 “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었다”라고 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재사(才士) 임에는 틀림없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어 곧은 도리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함과 포악함을 마음대로 하여 큰 역적에 이르렀다고 하여, 궁극적으로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충(忠)과 사대(事大)의 기준에서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645년 이후 고구려와 당의 전쟁 상황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 사서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였는데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전쟁 상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삼국사기』의 찬자들이 편의상 중국 측 기록을 선택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 역시 앞에서 열거한 중국 사서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고 있다는 점은 연개소문의 평가에 있어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에 대한 흉폭하고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면모는 실제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충과 사대라는 유교의 틀 속에서 과장된 평가일 수도 있고, 나아가 중국인의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만들어진 연개소문상(像)의 결과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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