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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의 역사 인물 중 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홍국영에 관하여 포스팅을 해 보겠습니다.
홍국영의 생애중 초반
홍국영(1748년~1781년 4월 28일)은 조선 영조, 정조대의
세도 정치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시절 때부터 정조의 총애를 얻었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홍낙춘이고 어머니는 우봉이 씨로 이유(李維)의 딸이며
당시 아버지 홍낙춘은 관직이 없었다. 훗날 딸이 원빈으로
간택되면서 가감역,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게 된다.
홍낙춘은 서울 풍산 홍 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이며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 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
영안 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영안위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장남 홍만용은 홍봉한, 홍인한,
홍용한, 홍준한 형제와 홍상한의 증조부이다
홍주원의 차남 홍만형은 홍국영의 5대 조이나 홍만형은 조선왕조
기준 멀지 않은 친척이었던 홍인한과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다. 혜경궁 홍 씨(영조의 차남인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는 한중록(혜경궁 홍 씨가 궁중생활 60년을 기록한 자전적인
회고록)에서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 대해서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홍낙춘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로 대게 해석이 된다. 실제로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다. 그러나
홍낙춘은 원빈이 후궁이 되기 전까지는 관직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홍국영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조선의 21대 왕 영조의 계비)김씨 외 이익보, 이정보, 통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 인척 관계이며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였다.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으며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혜경궁 홍 씨는 홍국영을 예쁘장한 외모였다며
동궁(세손 산)도 홍국영을 얼굴도 어여쁘고 슬기롭고
민첩하다 여겼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세손이 그를
총애하면서 다른 동궁 관료들을 멀리했다며, 사나이가
첩에게 혹한 모양이라고 품평했고 심낙수는 은파산고에
그가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하였으며 얼굴
생김새가 준수했다고 한다. 그는 친척인 홍인한(조선
후기의 정치가. 혜경궁 홍 씨의 이복 삼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중록에 의하면 홍인한은 영안 위 후손에
이런 물건이 나왔느냐 혹평했고, 이를 듣고 홍국영은
앙심을 품었다. 홍인한이 세손을 반대하자 세손을
보호하던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역시 공격했다.
혜경궁 홍 씨에 의하면 홍국영의 백부 홍낙순과 자신의
숙부 홍인한이 서고 원수처럼 여긴 것, 홍인한이 홍국영을
어떤 이유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홍인한이 홍국영을
꾸짖은 일, 홍국영이 아버지 홍낙춘의 관직을 홍봉한에게
여러 번 청탁하자, 홍봉한은 상중이라서 거절하다가
홍인한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홍인한이 편지에
홍국영을 미쳤다고 적은 것을 홍국영이 보게 된 것을
이유로 들었다. 1769년 동궁(세손 산)은 흥은 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영조의 아홉 번째 딸,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정조의
고모), 홍국영 등이 목격했다. 화완옹주와 홍국영이
각각 혜경궁 홍 씨에게 알렸고 혜경궁 홍 씨는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세손이 사도세자처럼 될까 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는데 홍봉한이 개입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 씨 한중록에 의하면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 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고
언급되었는데 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홍국영의 동궁 궁료 시절
홍국영의 동궁 중료 시절을 살펴보자면 1772년 9월
정시(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 해 4월 정민시(조선 영조, 정조 시대
문관 관료 겸 정치가)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을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設書)로 임명된다.
흔히 알려져 있기에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널리 펴져있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세손 산과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현각법어>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는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고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이 시기 홍국영을
"세손의 오른 날개"라 불렸는데 <명의록>에
이 내용이 적혀 있다.
정조의 오른 날개 홍국영
정조가 즉위하자 홍국영은 정조의 오른 날개로써
본격적인 집권기를 맞이하게 된다.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하였다. 정조는 정적이었던
정후겸, 홍인한 일당을 공격, 숙청하였다.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이 조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다. 흔히 퍼져 있는 속설은 홍인한, 정후겸이
정조의 즉위를 막았다는 내용이 널리 펴져 있으나
이는 와전된 내용이고, <명의록>에서 밝힌 공식적인
죄명은 첫째, 세손의 대리 청정을 막은 것
둘째, 세손의 오른 날개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명의록>에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과정을
도움 1등 공신이자 최측신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1777년 정조 1년 통계능, 홍상간 등이 모의하여
경희궁에 자객을 침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을 처분하면서 다시 공초 내용을 <속명의 록>
에 수록하여 편찬하였으며 속명의 록의 죄인들 역시
홍국영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심지어 집안의 여인들까지도 홍국영의 저주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이상은 정조시대의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정조의
오른날개로 불리기 까지의 내용을
포스팅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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