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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의 역사 중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던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 관해 포스팅하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막강한 권력
철종(1831년 7월 25일~1864년 1월 16일,조선 25대 왕)은 1858년 유일한
적장자 이용준이 태어났지만 6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아들들 또한 영아기에 사망하였고 자녀 중 유일하게 혼례를 치른
영혜 옹주 또한 14세에 사망하여 후손이 단절되어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의 어린 둘째 아들이 순조(조선 23대 왕)의 양자가
왕위에 올라 고종(대한제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
흥선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로 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이는 세도 정권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고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조선시대 양반 지주들이 자치적으로 곡식을
저장해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제도)로 전환 시켰다.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큰 노력을 하였다.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서원(중국에서 발단,한자 문화권의 동아시아에
파급된 전근대 학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 시키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여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으며 의정부
종친부 이하 각 관서 및 도성의 수축도 이루어졌다.
이로써 한양 서울이 황폐해졌던 옛 모습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당백전(조선 말기 경복궁 중건을 목적으로 주조한 화폐. 상평통보)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세금과 강제 노동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1866년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로마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을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공격한 것이다. 프랑스는 흥선대원군의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여러 곳에서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이후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통상 교섭과
사과를 요구하여 왔다. 흥선대원군은 미국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긴 미국은
결국 물러가고 말았다. 이 사건이 신미양요이다.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졌는데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척화비에
적혀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가
잦아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와 민씨 정권
고종은 1873년 음력 11월 친정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왕비)를 필두로
한 여흥 민 씨(경기도 여주시를 관행으로 하는 성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 일본이 1875년 음력 9월 20일 운요호 사건(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문호를 개방하라며 압박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는데 이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1842년~1896년 2월 11일,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정치인)이 귀국할 때 가져온 책이 있었는데 <사의조선책략>
이라는 책이다. 조선책략은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이 1880년경에 저술한 외교 문제를 다룬 외교 방략서이다. 이 책의
내용은 김홍집, 박영효 등이 공동으로 정리한 수신사일기 중 2권에 따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고종은 이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조정에서는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고, 개화 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다. 그리고 1880년 음력 10월 11일
미국과 국교를 열었다. 그 후 뒤이어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불평등 조약들인데 이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조약들이었다. 보수적인 유생층은 개화 정책에 대하여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위정척사 운동은 한계를 드러내는데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중에서도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 혁신적인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였다.
오늘은 조선의 역사 중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 관하여
포스팅하였습니다.
많은 공감 부탁드립니다
2023.06.15 - [역사학] - 조선의 역사-후기
2023.06.10 - [역사학] - 조선의 역사-중기
2023.06.08 - [역사학] - 조선의 역사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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