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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잘 알려진 왕이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일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개혁군주이다.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인인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왕이기도 하다.

 

위태위태한 고려왕

공민왕이 살았던 시기는 국내외 정세가 격동하던 때였다. 원나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충렬왕대 이후 고려 국왕은 폐위와 복위가 반복되는 자리였다. 충렬·충선·충숙 세 왕이 각각 중간에 한 차례씩 폐위되었다가 복위하였고, 충혜·충목·충정 세 왕은 각각 5년도 채 안 되어 폐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왕조가 극심한 불안 상태로 빠져들었음을 입증하는 적신호였다. 왕실과 권신들 간의 내분은 그치지 않았고 민생은 문자 그대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험난한 역사의 파고가 드센 시기에 역사의 주역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공민왕. 그 앞에 놓인 운명이 곧 고려의 운명이었다.

고려 국왕의 단명은 원나라 황제들의 빈번한 교체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 무렵 원나라는 1294년 세조가 죽은 직후부터 황제 자리의 다툼과 권신들의 전횡이 심하였다. 반세기 동안에 황제만도 11명이나 바뀌고, 공위 상태만도 3~4회씩이나 되풀이되었다. 국가는 여러모로 파탄이 난 지 오래였고 백성은 백성대로 각종 부역과 천재·기근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각종 반란과 함께 홍건적까지 봉기하여 원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려 31대 왕 공민왕은 이러한 혼란 시기에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역경을 딛고 왕이 되다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 전(顓). 초명 기(祺).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덕비 홍 씨로 원나라 공주가 아닌 고려 여성이었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1351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약 10년을 연경에서 살았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辮髮)·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신하들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변발을 풀어헤치고 원나라 옷을 벗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민왕의 영토회복과 국권회복운동은 그가 변발을 풀어헤쳤을 때 이미 그 막이 오른 것이었다.

 

 

몽골의 흔적을 지우다

공민왕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거리에 돌아다니는 몽골옷을 입고 변발을 한 고려인들이었다. 만약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기모노를 즐겨 입고, 가부키를 본다면 그게 한국이었겠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것이 문화니까 그것부터 바로잡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전국에 왕명을 내려서 몽골풍을 금지한다 공민왕도 즉위 전에야 변발을 했지만, 즉위하자마자 변발을 풀고 몽골옷도 벗어던진다.

원나라 순제의 제2왕후 기황후는 고려여자였다. 기황후는 원래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였는데 순제의 눈에 들어 제2왕후의 자리에 올라 태자 애유식리달랍을 낳으면서 일약 핵심 권력자로 부상했다. 기황후에게는 기식·기철·기원·기주·기륜 등 여러 명의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여동생 덕분으로 고려와 원나라에서 모두 득세하며 친원 세력의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황후의 세력을 배경으로 천하를 주름잡으며 영화를 누리던 기 씨 형제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왕 앞에서 ‘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친원파 가운데는 기씨 형제 외에도 조일신∙노책∙권겸이란 자가 있었다. 조일신은 원나라 체류 시절에 교류했던 사대부들의 후원에 힘입어 친원파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노책은 딸을 원나라 태자비로 바치고 집현전 학사가 된 자이며, 권 겸 역시 딸을 원나라 황태자비로 바치고 그 덕에 태부감 태감이 된 자였다. 원의 쇠락에 용기를 얻은 공민왕이 1차로 조일신을 제거하고 배원정책을 가속하자, 입지가 좁아진 기 씨 형제들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자 했다.

역모를 눈치챈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년)에 대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푼다고 속여 기철 일당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공민왕의 계책을 전혀 모르고 있던 기철과 권겸은 대궐 안에 들어가자마자 철퇴에 맞아 죽었고, 노책은 집에서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어서 기철의 아들 기유걸·기완자 불화, 노책의 아들 노제, 권 겸의 아들 권상화가 줄줄이 처형되면서 친원 세력은 일망타진되었다. 당시 기철의 아들 기유걸을 공개 처형할 때 수많은 구경꾼 가운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

몽골의 황녀와 결혼한 이전의 다른 고려왕들과 달리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를 끔찍하게 아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공주는 몽골인임에도 오히려 공민왕에게 개혁을 촉구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라고 조언을 해줬다. 자신의 조국을 버릴 정도로 공민왕을 사랑했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공주는 기질이 굉장히 강하고 굳세었다고 한다. 반면 공민왕은 섬세하고 꼼꼼했다. 공주는 공민왕에게 승마와 궁술을 가르치면서 단호한 정치인이 되도록 이끌어주었다.

또, 공주는 다른 고려왕들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걸 보면서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공민왕이 강해지기를 바랐고  한 사람의 장점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데다 두 사람의 사랑에 빈틈이 없었으니 정말 최강의 궁합이었다. 물론 숱한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공민왕이 위기에 처하면 그 옆엔 항상 공주가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흥왕사 암살 미수 사건’이다.

공민왕이 친원파들을 제거하자, 이들이 왕을 암살하려고 자객 50여 명을 왕이 머물고 있던 사찰인 흥왕사에 보낸다. 경호병들도 혼비백산 달아나거나 죽임을 당해서, 왕의 거처는 완전히 포위가 되는데 그때 문 밖으로 나와 그를 지킨 사람이 바로 노국공주였다. 결국 자객들도 감히 원나라의 공주를 해칠 수는 없었고 암살사건은 미수로 끝나게 된다.

 

기황후의 반격

원의 기황후는 자신의 일족들이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자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최유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최유는 원나라에 체류하고 있던 대표적인 친원파로 충정왕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운 자였다. 최유 일파가 옹립하려 한 덕흥군은 충선왕과 궁인 사이에 태어난 왕자로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원나라로 건너가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때마침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움직여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정해 주자 최유는 요양성의 군대를 빌려 고려로 쳐들어가려 했다.

1364년(공민왕 13년) 1월 1일 덕흥군을 받든 최유는 마침내 원나라 군사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했다.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위사에 임명하여 안주의 관군을 모두 지휘하게 하고, 또 이성계에게는 정예 기마병 1천을 주어 최영을 돕게 했다. 이에 최유는 기세가 꺾여 다시 원나라로 달아났는데, 이후에도 최유는 계속해서 본국을 헐뜯으며 다시 침공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국력이 쇠퇴한 원나라는 고려와 불화를 빚는 것을 원치 않았고 마침내 원 순제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공민왕의 복위를 승인하는 조서를 보냈다. 그리고 최유를 포박하여 고려로 압송시키고 덕흥군은 영평부로 귀양 보내 버렸다. 최유는 이해 11월에 고려에서 처형되었다.

 

사랑하는 노국공주를 잃고 방황하는 공민왕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왕릉이라는 공민왕릉.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와의 사랑은 700년을 건너뛰어 오늘날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개성 근교에 자리 잡은 공민왕릉은 고려왕릉 가운데 유일한 부부 쌍릉이다. 죽어서도 함께 한 이들의 사랑이었지만, 출발은 정략결혼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정치 경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생모가 고려인인 관계로 왕위 계승에서 번번이 낙마한 공민왕은 1349년(충정왕 1년)에 정략적으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고 2년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365년(공민왕 14년)에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그녀를 잊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울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신돈의 왕권강화와 개혁

공민왕은 슬픔에 잠긴 채 정치에서 손을 떼고 승려 신돈에게 모든 일을 맡긴다. 개혁을 추진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개혁을 성공시키는 건 더 힘든 일이다. 개혁자는 기본적으로 기존 세력과 끈이 이어져 있으면 안된다. 그럼 또 부패할 테니까. 그런 점에서 공민왕은 신돈을 선택한 것이다. 일단 신돈은 어렸을 적 출가해서 욕심이 없어 보였다. 또 절 노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정권을 쥐락펴락할 가족도 없었다. 그럼 왕 대신 전면에 나선 신돈이 해야 할 개혁은 뭐였을까? 바로 왕권강화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권문세족들의 뿌리를 뽑아내고, 왕의 위신을 세우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의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그들이 바로 신진사대부 이다.

 

신돈은 자신을 지지해 주는 개혁세력들과 당시 왕권을 약화시키고 신진사대부의 진출을 방해하고 있던 정방 폐지한다. 또 권문세족들이 힘없는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땅을  원래 땅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 정책을 추진한 기구가 바로 전민변정도감이다. 도감은 임시로 설치된 기구인데 고려 광종 때 노비안검법과 굉장히 유사하다. 두 제도가 가져온 긍정적 결과는 권문세족(호족)을 약화시키고 세금 내는 계층을 늘려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는 데 있다. 백성의 삶은 좋아졌고 이때 혜택을 본 많은 사람들은 신돈을 성인으로 추앙했다. 신돈의 권세도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았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신돈을 제거하기 위해 자객도 보냈고 반역을 꾀했다는 소문도 퍼뜨린다. 상황이 이쯤 되자 공민왕도 신돈을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신돈은 역모 혐의로 처형을 당한다. 신돈 처형 이후 공민왕은 개혁을 포기하고 향락에 빠져 살다가 시해당하면서 개혁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공민왕의 비참한 죽음

본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살아 있을 때에도 왕비의 침소에 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노국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가 죽은 뒤로 계비를 들이기도 하고, 혹은 신돈과 함께 불공을 드리며 축원하기도 했으나 후사를 얻지 못했다. 그 사이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다 신돈의 비첩인 반야라는 미인을 보고 총애하였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은 반야는 1365년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공민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이다. 우왕의 어릴 적 이름은 모니노()였는데 그를 몹시 사랑했던 공민왕은 자주 장난감을 갖다 주며 부정을 나타냈다.

 

공민왕은 신돈이 실각한 뒤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제위(子弟衛)를 두어 나이 어린 미소년들을 뽑고는 동성애와 관음증에 빠져 지내기 일쑤였다. 자제위는 형식상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집단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들 자제위 미소년들과 기괴한 유희를 즐겼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휴가도 주지 않았다.

공민왕은 태후가 우를 세자로 허락해 주지 않자, 다시 후사를 걱정하였다. 급기야 홍윤 등 자제위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동시에 비빈들을 임신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홍윤·한안 등 자제위 출신들과 그의 비빈들을 억지로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는 희망을 품었으나 정비·혜비·신비 등 3비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공민왕은 마지막으로 익비를 김흥경과 홍윤·한안 등이 간음하도록 했다. 이때 익비 역시 거부하자 공민왕은 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간음을 시켰고, 이후 익비는 임신을 하였다.

 

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 사실을 아는을 없애고자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침전에 들어간 최만생과 홍윤 등은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공민왕의 온몸을 칼로 마구 찔러댔다. 이들이 휘두른 칼에 공민왕은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공민왕의 나이 45세였다. 그 뒤 최만생·홍윤·한안·권진 등은 왕을 시해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들의 나머지 친족도 모두 잡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고, 공민왕 역시 실패한 군주로 남았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신진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파였던 정도전 등과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에게 많은 힘을 부여해 주었고, 이는 조선 건국의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장이던 고려의 국세도 생각보다 많이 회복하여 공양왕 대로 가면 조선 후기보다 국가에 등록된 전답의 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이 시기 고려가 조선보다 농업이 발전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업은 당연히 조선이 고려보다 훨씬 앞섰으며 고려가 회복되어 갔다 해도 왜구들 때문에 여전히 나라는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무신정권, 몽골, 권문세족으로 인해 처참하게 망해버린 고려의 국력을 꽤 회복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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